관계를 통해 죄의식의 심층을 파헤친 수작
※ 이 오디오북은 윌라가 독점적으로 계약하고 직접 제작한 윌라 오리지널 오디오북입니다.
★ 박경리 문학이 지향하는 인간애(人間愛)의 메시지
★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죄인’들에게 박경리가 던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나는 언니 불행의 제물이었던 거예요. 난 언니의 부속물도 꼭두각시도 아니란 말예요!”
희정은 전쟁 중 폭격으로 한 팔을 잃고 불구가 된 몸으로 어린 동생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진다. 이후 희정은 과거의 “많은 희생”을 희련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폭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또한 희련을 “소유물”처럼 여기며, 희련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독점하려 하고 희련의 부채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옭아맨다. 이 때문에 희련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희련에게 희정이 “불구자”라는 것은 “언니의 특권”이며 “치명적인 무기”다. “불구자로서 결혼할 희망이 없는 노처녀 희정의 존재”는 희련을 우울하게 하고, “자기만이 남과 같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정상의 생활”을 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게 만든다.
이혼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희련의 주변을 맴돌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전남편 ‘장기수’, 재력가인 은식을 차지하기 위해 희련을 음모에 빠뜨리는 후배 ‘송인숙’, 호시탐탐 희련을 노리는 플레이보이 ‘최일석’ 등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는 희련과 달리,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결혼제도’마저 “수지계산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인간 존재마저 물질화하는 세태 변화와 당대의 인간상을 작가가 예리하게 포착해내어 소설 속에 녹여낸 것이기도 하다.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화폐 뭉치나 수표액에 따라 사람이 가치 지어지는” 분위기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박경리는 끝까지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을 믿는다면 그 믿음만으로 살 수 있을 거예요. 설령 애정이 없는 존경만으로도. 괴롭겠지요. 견딜 수 없겠지요. 하지만 어떤 결함이 있다 해도 최소한 휴머니티가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없다면 그건 생명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박경리는 결국 “이해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결국 모든 인간이 죄인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죄의식’의 문제를 소환한 듯하다.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측은지심, 즉 인간애(人間愛)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작가의 길고 긴 고뇌가 담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것이다. 박경리의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치열하게 고뇌하는 그의 문학 세계 기저에 ‘사랑(휴머니티)’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69년 5월 24일부터 1970년 4월 30일까지 《경향신문》에 총 288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이후 1978년 범우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될 때 ‘나비와 엉겅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어 오랫동안 해당 표제를 유지했으나, 최근 다시 원제목 '죄인들의 숙제'로 출간되었다.
박경리 지음 | 토지문화재단 제공 | 전은희, 김정후, 서은비, 장지호, 홍종진, 강신일 낭독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을 비롯하여 『파시』(1964), 『시장과 전장』(1965)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4만 여장 분량의 작품으로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하였다. 박경리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원고지 분량에 걸맞게 6백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시간적으로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라는 한국사회의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격동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용재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1996년부터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대문학 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 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는 문학뿐 아니라 환경과 생태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1999년 원주 오봉산 기슭에 토지문화관을 세우고, 문학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2003)하고,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로 엮은 환경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2004)도 출간하는 등 사회와 인간을 향한 애정과 관심을 놓치 않았다. 2008년 5월5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한국현대문학의 영원한 고향으로 남았다. 타계 이후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수필집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등과 시집으로는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그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애가』가 있다.